“구시장 잔존 상인들, 개인적 욕심 버리고 시장 활성화 동참해야”
“도매시장 기능 위축되고 있는데 이런 모습 보이면 안 돼”
35년 노량진수산시장서 변화 몸으로 느꼈던 산 증인

 
“어디 가서 농사일을 도와주면 다른 사람보다 1.000원을 더 줬습니다. 우직하게 일만 했습니다. 형들이 너하고는 일하러 같이 안 간다고 했으니까요”
 
키 173cm, 체중 83kg의 건강한 청년이었던 수협노량진수산시장 영업본부장 이현주(58)씨의 20대초 얘기다. 부여서 농사를 짓는 가정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잠시 농사일을 도와주기도 하고 도로 공사에서 일을 하는 등 이런 저런 일을 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는 최선을 다했고 타고 난 성실과 근면성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좋아했다. 항공정비사 자격증과 밤 전지 자격증을 딴 때도 이 때다. 
그러다가 그는 서울로 와 일을 하겠다고 생각하고 83년 노량진수산시장 수탁사원으로 시장에서 일을 시작한다. 전두환씨씨가 집권하던 5공화국 시절이었고 시장은 주인이 바뀌는 등 격변기를 맞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노량진수산시장은 서울에서 유일한 수산물도매시장이었다. 85년 가락동시장이 생겼으니까 노량진수산시장은 수산물에 관해서는 모든 게 통했던 로마였다.
“당시 수탁물량이 연간 20만톤을 넘어섰을 때입니다. 산지서 물량을 팔아달라고 사정을 할 때입니다. 물량이 엄청 나 발로 차고 다닐 정도였으니까요” 8톤 트럭 70대 가량 물량이 하루 노량진시장에서 경매됐으니까 당시 상황이 어떠했는지 쉽게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는 5개월 뒤 속기사에서 경매사로 자리를 옮겼다. 수탁직원에서 정규 직원으로 자리가 바뀌었고 그의 노량진수산시장에서 35년 인생이 본격 시작된 것이다. 당시 시장은 수산물이 차고 넘치던 시기였다. 그의 말대로라면 시장에 고등어 오징어 갈치 삼치 조기 등이 ‘어마어마’했다. 서해안에서 자연산 광어, 민어 등이, 동해안에선 대구 굴 패류 등이, 삼천포 여수에서는 자연산 낙지가, 여기에 냉동 오징어, 냉동 동태가 경매장을 가득 메웠다. 동해안에서 올라온 명태가 발에 치일 정도였다고 그는 당시를 회상했다. “시장에서 짝(목상자)으로 사가지고 나눠먹고 양동이를  갖고 와 시장에서 멸치 새우를 사가던 때입니다”
시장은 활기에 넘쳤고 그 역시 시장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자원이 감소하고 1998년 산지 직거래 활성화가 시작되면서 노량진수산시장도 침체기를 맞는다. 수탁물량이 서서히 떨어져 80년대 20만톤까지 치솟던 수탁물량은 2012년에는 10만톤을 고비로 2013년에는 8만톤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지난해는 6만 3,000톤에 그쳤으며 올해는 9월말 현재 4만1,000톤이 수탁됐다. 시장 침체의 원인은 자원감소와 유통 환경 변화. 연근해 수산물 생산량이 100만톤 이하로 떨어졌다. 강제상장제가 임의상장제로 바뀌었다. 또 이마트 등 대형거래처가 산지와 직거래를 하고 산지에서 집까지 택배로 배달하는 시대가 됐다. 굳이 도매시장을 이용할 필요가 없는 시대가 왔다. 그의 말대로 도매시장 기능이 위축된 것이다. 
 
시장의 변화를 몸으로 느껴 왔던 그는 2001년 이런 변화에 대응키 위해 신설된 특수사업팀을 맞는 것을 시작으로 부서장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도매법인이 매취사업을 할 수 있도록 한 농안법 개정에 따라 특수사업팀을 활성화시킨 뒤 2001년 수탁사업부장을 시작으로 2006년 판매사업부장, 2010년 냉장사업부장, 2014년 감사실장, 2015년 유통사업부장을 맡았다. 유통사업부장 때에는 중도매인과 항운노조가 현대화 시장으로 이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또 신시장 초매경매를 주관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2016년 노량진수산시장의 꽃으로 불리는 영업본부장을 맡았다. 그리고 지난 달 재임에 성공했다. 시장 사람들은 그의 재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아직 영업에서 그를 따라 갈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서다. 
 
그는 노량진수산시장 전망에 대해 묻자 ‘고립’이라는 표현을 썼다. 동쪽에는 강동수산, 서쪽에는 수협외발산동, 북쪽에는 강북, 구리시장, 남쪽에는 수원, 안양, 안산 등의 시장이 노량진수산시장을 둘러싸고 있다는 것이다. 동·서·남·북으로 분산되던 것이 사방에 막혀 있는 형국이라고 했다. 빠른 시장 변화, 갈수록 악화되는 주변 여건, 이런 상황에서 신·구시장 갈등은 치명적이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빨리 불법시장이 정리돼야 합니다. 도매시장 기능이 위축되고 있는데 안에서 싸움만 하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시장 정상화에 따른 영업 활성화가 가장 시급합니다”
그는 “가장 지장을 받는 게 영업”이라며 “구시장 잔존 상인들도 개인적인 욕심을 버리고 시장 활성화에 동참해달라”고 빠른 입주를 요청했다. 
또 시장 종사자들에게는 “이제 명성만 갖고는 과거와 같은 영예를 누릴 수 없다”며 변화와 분발을 촉구했다. 
“중도매인들도 이제 과거 생각만 해서는 안 됩니다. 중도매인들도 밖에 나가 뛰어야지 안에서 안주하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산지 위판장에서 어떻게 고기를 만들어 가지고 오는 지, 그 사람들 사정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는 이를 위해 “사정이 허락하면 중도매인들과 함께 산지를 견학해 그들이 시장서 얼마나 행복하게 장사를 하는 지 느끼게 해주고 싶다”고도 했다. 
 
그의 업무는 밤 11시부터 시작된다. 산지에서 올라오는 수산물을 수탁처리하기 위해서는 밤을 반납할 수밖에 없다. 끝나는 시간은 그 다음날 새벽 9시, 영업본부장 산하 유통사업부, 냉장사업부 소속 직원 50여명과 함께 꼬박 밤을 새우며 1일 200여톤을 처리한다. 이 수산물이 신선하게 서울시민의 식탁에 오르게 하기 위해서다. 군대 근무 시 73kg까지 떨어졌던 체중이 지금 110kg까지 늘었다. 거꾸로 된 시간, 긴장을 할 수밖에 없는 업무 등이 원인일 수 있다. 35년 시장 생활 중 절반 이상이 낮과 밤이 뒤바뀐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 같으면 그것이 아니라도 그것 때문이라고 이유를 댈 수 있는데도 그는 아니라고 했다. 그가 농사일을 도울 때 왜 남보다 1,000원을 더 받았는지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시장에 들어서면 상인들은 그를 따뜻한 시선으로 맞는다. 언제나 마음으로 그들을 대하기 때문이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는 요즘 교회 장로 시험 때문에 열심히 교리 공부를 하고 있다. 그는 최근 들어 부쩍 ‘시장의 평화’를 얘기하고 있다. 수탁수산물이 차고 넘치지 않더라도 갈등이 없는 시장을 꿈꾸고 있어서다. 현대화 건물을 짓고 나서 신·구시장 갈등이 아마 그를 그렇게 만든 모양이다. 35년간 똑 같은 길을 걸으며 시장의 변화를 몸으로 느끼며 살았던 이현주본부장, 경매를 끝내고 시장을 나서는 그의 넓은 어깨 위에 10월의 아침 햇살이 살포시 내려앉는다. <문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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