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방치해 놨던 전답들 생명 살리는 일 하고 있어”
어업인교육문화복지재단 명칭에서 주인인 어업인 왜 빼나
“수협 임직원 어업인 위에 군림하려고 하면 안 돼”

 

“중앙회장 이렇게 힘없고 형편없는 자린 줄 몰랐다”
수산신문 관련 질문 가슴에 남겨둔 채 서울로

 

이종구(69) 전 수협중앙회장을 만나러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지난 15일, 일산 백마역에서 아침 7시 31분 경의선을 타고 서울역에서 내린 후 진주행 KTX로 갈아탄 게 8시 25분. 기차는 약속된 시간에 어김없이 서울역을 빠져나갔다. 광명역을 지나 20여 분을 지나자 기차는 어느새 진한 초록색 들판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이 회장이 수협회장으로 취임한건 2007년 1월 25일, 그 이후 8년간 수산신문과 이 회장 간에 있었던 숱한 사연들이 차창 밖 풍경과 섞였다 흩어지면서 나의 기억은 늙은 영사기처럼 서다 가기를 반복했다.
창원 중앙역에서 진해구청 앞 식당을 가기 위해 택시를 탄 게 11시 20분. 그러니까 서울에서 이곳까지 걸린 시간은 채 4시간도 안 됐다. 그런데도 여기까지 오는 데 몇 년이 걸린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10여 분 후 내가 식당에 도착했을 때 이 회장은 입구 창가 옆 조그만 방에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5년여 만에 재회. 모처럼 만에 본 그의 얼굴은 그리 늙지도 않았으며 너무나 편해 보였다.

-그동안 잘 있으셨나요? 얼굴이 편해 보이십니다.
“별로 신경 쓸 게 없어서 그런가 보죠” 사족이 없는 대사는 여전했다. 난 가방에서 녹음기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말을 메모하기 위해 취재 수첩을 꺼냈다. 내가 올라갈 열차를 예약해 놓은 게 오후 3시 6분. 그러니까 그를 인터뷰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2시간 정도뿐이 안 됐다. 할 얘기는 많은데…. 마음이 급했다. 그렇다고 만나자마자 취재를 시작한다는 것도 어색했다. 말을 돌렸다.

-요즘 뭐 하시나요 이런저런 일을 하신다는 얘기를 듣긴 했는데요?
“그동안 전답들을 방치해 놓고 관리를 안 해 그것들의 생명을 다시 살리는 일을 하고 있어요. 또 사람도 만나고 책도 읽고. 땅도 팔 때는 팔고 해야 하는 데 그동안 우직하게 갖고만 있었던 것 같아요. 성격이 그래서…”

-회장 그만두고 내려와 곧바로 국회의원 출마하지 않았나요?
“수산계 출신 국회의원이 한 사람도 없잖아요. 누군가 국회에서 수산계를 대변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내려오자마자 새누리당 당내 경선에 참여했어요. 지지 당원도 많이 확보했고 당원도 많이 늘렸고. 그런데 떨어졌어요. 경선에 참여하지 말고 곧바로 본선에 갔으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르는데…. 무소속으로 본 선거에 뛰어들지 못한 게 제일 후회스러운 대목에요” 그는 진해에서 김성찬 전 해군참모총장과 새누리당 경선에서 맞붙었다.
그는 “판단을 잘못했다”고 했다. 무슨 판단을 잘못했느냐고 묻자 “떨어졌으니까 판단을 잘못한 것 아니냐”며 웃었다. 그러면서 “수산인이 국회에 진출하려고 하면 미워도 도와줘야 하는 데 먼 산 불구경하듯 하고 은근히 방해하는 사람까지 있더라”고 했다. 당시 수산인들이 그래선 안 된다는 서운한 생각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모양이다.

-많은 선거를 했을 텐데 그게 몇 번째 낙선인가요?
“어촌계장 선거부터 시작해 5번의 조합장 선거, 도의원, 중앙회장 선거 등 많은 선거를 해 봤어요. 떨어진 건 2번이고…. 한번은 처음 중앙회장 선거 때이고 이때가 두번째였어요”

그의 수산계 이력은 이렇다. 그는 1973년 고향인 진해 제덕마을에서 어촌계 간사가 된다. 당시 나이가 21살. 그리고 2년 후 이 마을 최연소 어촌계장으로 본격적으로 지도자의 길을 걷는다. 그러다 36세 되던 1987년 진해수협이 부실수협이 되자 진해 수협조합장에 도전한다. 어려운 수협을 한번 일으켜 세워보겠다는 호기가 작용했던 것이다. 그는 당선 후 피조개는 일본 수출을 하기 때문에 조합에 위판을 안 해도 되는데 조합 경영개선을 위해 위판을 시켰다. 또 조합장 재임 시 3년 간 조합장 실비를 한 푼도 안 쓰고 모아 진해수협장학회(진수장학회)를 만들었다. 어민들이 자녀를 열심히 공부시켜야 자녀들이 훌륭한 사람이 돼 지금 환경을 개선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게다가 돈을 벌기 위해서는 상호금융 점포가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하나뿐인 상호금융 점포를 5개로 늘렸다.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 보니 그의 말대로 지역에서 그에게 도전할 사람이 없었다. 이후 내리 3선을 했다. 그러다 1995년 도의원 당선, 이후 다시 연속으로 2번 조합장에 당선돼 최장수 조합장 반열에 오른다. 그리고 2번의 도전 끝에 2007년 1월 25일 드디어 수협중앙회장에 취임한다. 8년 2개월 재임, 그에게 최장수 회장이라는 근사한 타이틀이 주어졌다.

-회장으로 장기집권을 했는데 직접 중앙회 안으로 들어와 보니까 일을 할 만하던가요?
“난 이렇게 중앙회장이 힘없고 형편없는 자린 줄 몰랐어요. 경제는 경제대표가, 신용은 신용대표가 하도록 돼 있어요. 회장이 의지를 가지고 소신껏 할 일이 별로 없어요….(이런저런 생각이 스쳐간 듯 잠시 말을 멈춘 뒤)난 대표들에게 과도한 요구를 한 적도 없고요” 지금 생각해도 당시가 썩 좋은 기억이 아닌 모양이다.

-속이 많이 상했던 모양이죠?
“농민과 어민의 격차를 보면 속이 상했어요. 농민은 되는 데 왜 어민은 안 되는지, 공적자금을 받았다고 해도 이건 너무 심한 게 아닌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많았어요. 옛날엔 우리나라 어업인 소득이 농업인 소득보다 높았어요. 그러나 갈수록 농업인에 뒤처지고 있잖아요. 너무 안타까워요”

-회장 때 어업인교육문화복지재단(현재는 수협재단)에 많은 신경을 쓰셨죠?.
“어려운 진해수협 조합장 때도 ‘진수장학회’를 만들어 운영했어요. 중앙회 와서는 정말 재단 같은 재단을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또 재단만 되면 기금 유치는 삼성재단보다 더 잘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우리나라 수출입품의 90%가 해상을 통해 들어오고 있잖아요. 게다가 공장 폐수, 기름 피해, 바다모래 채취, 해상 풍력 등 우리 어업과 어업인을 망치게 하는 일들이 한 두개가 아니잖아요. 화물선에 어선들이 로드킬 당해 어업인들이 죽기도 하고요. 이렇게 어업과 어업인에게 피해를 주는 주체들에게 일정 비율 기금을 내게 해 이 돈으로 어업인교육문화복지재단을 운영하려고 했어요. 한 두 개만 제대로 된다면 나머진 저절로 따라 올 줄 알았어요. 이 기금만 제대로 조성된다면 정말 어려운 어업인들의 삶의 질을 개선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고요”

-중국어선의 불법조업 벌금을 재단기금으로 편입해야 한다는 얘기를 강력히 주장하지 않았나요?
“우리 어업인들이 치어를 방류하고 금어기도 설정해 자원을 조성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중국어선들이 우리 어업인들이 잡아야 할 고기들을 불법으로 잡아 가고 있어요. 그럼 그 돈은 피해를 본 어업인들이 보상을 받고 자원을 조성하는 데 쓰여 져야 하는 게 맞지 않나요?” 어업인교육문화복지재단 얘기가 나오자 다소 흥분한 듯 그의 말이 빨라졌다. 사람이 흥분하는 것은 자기 철학이나 생각, 기대가 다른 것과 충돌할 때 생기는 현상 중 하나다. 할 말이 많은 모양이다.

“이런 목적으로 어업인교육문화복지재단을 만들었는데 지금 당초 재단 성격이 변질됐어요. 어업인교육문화복지재단 이름을 ‘수협재단’으로 바꾼 것 같은데 난 도저히 이해가 안 돼요. 재단에서 주인인 어업인을 빼고 수협이란 이름을 넣는 게 이치에 맞지 않아요. 나쁘게 보면 수협직원까지 재단 혜택을 보려고 이런 짓을 하는 게 아니냐는 얘기를 들을 수도 있고요” 그는 재단의 당초 취지가 훼손된 것을 몹시 아쉬워했다.
“해상풍력, 바다모래 채취 등은 물론이고 화물선, 기름운반선협회 등 바다에 해를 끼치는 산업이 엄청 커졌어요. 이들로부터 일정액을 받아 기금을 조성하면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재단으로 키울 수 있어요. 그런데 이런데 신경은 안 쓰고 ‘농협재단’을 베껴서 ‘수협재단’으로 이름이나 바꾸는 게…”
그러면서 “특성이 다른 데 농협을 무조건 따라 해선 안 된다”며 “밑바닥 어민들만 불쌍하다”고 했다. 그는 얘기 도중에도 연신 고기(등심)가 타지 않도록 고기를 뒤집고 익은 고기를 내 접시에 옮겨주기도 했다. 내가 얘기를 적느라고 고기를 뒤집을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재임 때 일선수협 구조조정도 하지 않았나요?
“상호 금융이 적자인데다 순자본 비율이 마이너스였어요. 새마을금고가 도산하고 있는 가운데 완도수협 등 일선수협 구조조정이 진행됐어요. 밤에 잠이 안 올 정도로 불안했어요. 그 때 상호금융예금자보호기금이 만들어졌고요”

-재임 때 못하고 나와 아쉬웠던 게 있나요?
“재단 기금 만들 때 정부 출연을 받아야 하는 데 못 받은 게 제일 아쉬워요. 태안기름유출사고 때 정부에서 성금을 분배할 방법을 못 찾아 시간을 끌고, 심지어 다방 종업원까지 성금을 받아 갔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는데 기금을 만들지 못했어요. 정말 아쉬운 대목에요” 조합장 동시선거와 중앙회장 선거에 대한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조합장 선거를 같은 날 전국에서 동시에 실시하는 등 선거제도가 옛날과 많이 달라졌죠?
“조합장 동시 선거는 개인적으론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동시선거는 공정한 선거가 첫째 목적일거에요. 그런데 선관위 기구는 늘어난 것 같은데 불법 선거는 여전하지 않나요? 어려운 조합들도 위탁선거 때문에 몇천만원씩 내야 되는 게 맞지 않은 것 같고요. 투표소를 선관위가 임의로 지정해 투표 참여율도 떨어지고 있지 않나요? 협동조합은 자조조직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공정한 선거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해요” 그러나 중앙회장 선거에 대해서는 그는 입을 다물었다. 똑같은 조건으로 선거를 했던 사람이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는 게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퇴임 후 밖에서 수협을 봤을 때 어떻던가요.
“수협뿐만 아니라 농협도 마찬가지지만 협동조합은 이제 변해야 돼요. 앞으로 협동조합이 자기 혁신을 안 하면 도태되거나 타의에 의해 조직이 바뀔 수밖에 없어요. 지금 지도자들이 미래를 내다보고 자기 혁신을 지속적으로 해야 해요. 협동조합이 왜 생겼는지, 그리고 설립 목적대로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 지 항상 돌아봐야 돼요”

 시계가 2시10분을 가르치고 있었다. 나가서 사진을 찍고 다시 창원 중앙역에 가려면 이제 인터뷰를 끝내야 한다. 그래서 끝으로 수협임직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얘기가 있냐고 물었다.

 “어업인 위에 군림하려고 하면 안돼요. 수협은 군림하는 자리가 아니고 봉사하는 자리에요 항상 그 의미를 새겨야 합니다.” 그의 얘기는 짧지만 묵직했다.
2시 30분, 그의 차가 창원 중앙역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동승한 난 그가 우리 신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꼭 물어보고 싶은 얘기를 가슴에 남겨둔 채 15분 후 그의 차에서 내렸다. 하늘은 서울서 내려 올 때 간간히 보였던 잿빛 구름들이 걷히고 넓은 바다처럼 파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문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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