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주가 만난 사람/차석교 전 인천수협조합장

“돈 천만원이면 할 수 있는 패각처리도 못하면서
어촌 관광 사업 얘기하는 것은 한마디로 웃기는 얘기”
서슬 퍼렇던 이종구 회장 때도 할 소린 다하&

차석교 전 인천수협조합장

 2008년 4월 25일 수협중앙회 임시 총회 때다. 차석교 당시 인천수협조합장은 추가경정 예산안 처리와 관련, 중앙회가 양식보험 특별 회계에서 발생한 2억 9,600만원을 지도사업 회계 수익으로 계상하지 않고 다른 비용으로 변칙 처리한데 대해 집행부를 강도 높게 추궁했다.

그는 “지금 얘기는 급하면 중앙선도 넘어간다는 얘기 아니냐”며 “원칙은 아니나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조직에서 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다. 중앙회가 전국 수협장들 앞에서 편법을 쓰도록 가르쳐 주는 것이냐. 수협중앙회가 전국 94개 조합을 관리 감독할 수 있는 조직체인데 원칙이 아닌 편법을 쓰면서 괜찮다고 얘기하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다”고 강하게 질책했다. 이종구 수협회장 권위가 하늘을 찌를 때다.

그해 8월 13일, 그는 수협 개혁과 관련해 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도 “지금 어민들은 고유가라고 난리인데 중앙회가 어민들 상대로 기름 장사하는 것 아니냐”며 “잉여가 얼마 발생했다고 자기들끼리 표창을 하는데 가관이다”고 중앙회에 직격탄을 날렸다.

그러면서 “지금 중앙회는 상호금융, 공제 때문에 잘 먹고 사는 것 아니냐”며 “일선 조합을 머슴처럼 생각하면서 딴생각만 하고 있는 것 같다”고도 했다. 중요한 길목에서 나오는 그의 발언은 항상 날카롭고 의미심장했다. 그래서 중앙회장 선거 때면 의례 그의 이름이 오르내렸고, 중부권 맹주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때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가끔 열변을 내뿜던 그의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고 했다. 

 그는 2009년 4월 인천 중구청장에 나가기 위해 조합장직을 사퇴했다. 옹진수협 직원으로 시작해 인천수협에서만 13년 11개월 조합장을 한 그가 조합장직에서 스스로 물러난 것이다. 그리고 지난 26일 본지는 그를 소환했다. 지금 수협에 문제가 무엇인지 그의 날카로운 지적을 듣기 위해서다. 그는 역시 ‘차석교’였다. 상전벽해처럼 변해버린 인천시 중구 무의도 큰무리로 입구, 2층짜리 그의 집 옆 나무 아래서 가진 1시간 가까운 인터뷰 내내 그는 수협의 문제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수협중앙회가 어업인을 지원하려면 어업인이 살고있는 어촌 환경이 어떤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지원을 할 거 아닙니까. 아까 들어오다가 봤겠지만 무의도 관문인 바다 백사장이 패각으로 뒤덮여 있는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아요, 패각을 걷어내고 모래를 뿌려 백사장을 복원하는데 천만원이면 가능하다고 해요. 이게 관광어촌입니까. 돈 천만원이면 할 수 있는 패각처리도 못하면서 어촌 관광 사업 얘기하는 것은 한마디로 웃기는 얘기입니다. 중앙회장과 중앙회 임원들이 휴가 때면 어촌에 놀러가라고 서울역 등에서 홍보물만 나눠주면 뭐 합니까?”

 그는 인천 연안부두에 위판장이 3개가 몰려 있는 것에 대해서도 “말도 안 되는 짓거리”라며 강하게 중앙회를 성토했다. “연안부두에는 인천수협, 옹진수협, 중앙회 공판장이 모여 있어요. 지금까지 중앙회 공판장이 왜 있어야 합니까. 옛날 중대형 어선들이 들어와 고기를 위판할 때 같으면 중앙회 공판장이 필요하다고 해요. 그러나 지금 중앙회 공판장에 이런 배들이 들어옵니까. 일선 조합에서 위판사업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 게 중앙회입니다. 일선조합과 경쟁하라고 중앙회 만든 건 아니잖아요. 이게 말이나 됩니까? 내가 조합장 때부터 그렇게 지적했던 사항인데 아직도 안 되고 있습니다”

 그의 지적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조합 업무구역도 바뀌어야 합니다. 지금 옹진수협은 업무구역이 경기도 안산, 시흥에다 옹진군 백령도 등 너무 넓습니다. 일부는 영흥수협이나 경기남부수협에 넘겨줘야 합니다. 조합원 편리성만 생각한다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인천수협, 경기남부수협도 업무구역 조정을 해야 하고요. 그러나 조합장 선거에서 이것이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데 이게 조정이 되겠습니까. 해양수산부나 중앙회가 어업인 편의를 위해 과감히 나서야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농민은 농협에 의존해서 살고 있다. 비료서부터 병원 입원하면 도와주고 농민의 지팡이 노릇을 하고 있다”며 “그런데 수협은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조합장들의 중앙회 총회 때 발언에 대해서도 “총회 때 바른 얘기하면 중앙회 감사 때 불이익을 받을 수 있었던 시기가 있었다”며 “그런데도 우린 다는 못했지만 최소한 할 소리는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이라도 바다를 사랑하고 어민들 복지를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지도자가 돼야 한다”며 “중앙회가 바로 나고 거듭나야 조합도 살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얘기는 지금도 가공되지 않은 순수함 그대로였다. 거칠고 투박하긴 했지만 어민에 대한 애정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 보였다.

 “섬에서 어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선도 운영해 보고 옹진수협에서 직원으로 공판장장도 하는 등 경제사업도 해봤고요. 조합이 분조해 인천수협에서 14년 동안 조합장도 했고 인천시 중구 초대 구의원도 했습니다. 또 20년 동안 1,000억원 가까운 꽃게 수출도 해봤습니다. 어찌 내가 어업과 수협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좋은 지도자들이 나와서 수협이 발전하고 어업인들이 행복한 세상이 됐으면 하는 바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문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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